중국여행

[중국여행]60년지기 덕곡친구들 용문석굴 향산사 백거이묘 트레킹.

나미로 2015. 3. 21. 22:40

60년지기 덕곡친구들

중국낙양 용문석굴, 향산사, 백거이묘 방문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대동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힌다.

하남성과 낙양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명성이 대단하며,

명성에 걸맞는 규모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보러 낙양에 들르는 여행객이 대부분일 정도다.
이곳은 하남성 낙양시 남쪽 13㎞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백거이 묘가 있는 향산과 용문산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이곳의 시작은 북위 효문제 때에 대동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했을 때부터

운강석굴을 계승하는 형식으로 처음 뚫어졌고 그 작업이 동서위, 북제, 북주, 수,

당에 이르는 400년간 계속되었다.
현재는 2345여 개의 석굴, 2800여 개의 비문, 50여 개의 불탑, 10만 개 정도의 조각상이 남아있다.

용문석굴은 현존하는 종교, 미술, 서예, 음악, 의료, 건축 등 방면의 살아있는 역사 자료이다.

따라서 '대형 돌조각 예술 박물관'이라고도 칭해진다.
용문석굴은 주로 북위시기와 당대 측천무후(武則天)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규모가 가장 크고, 유명한 굴은 당대 측천무후 시기에 만들어진 봉선사 석굴이다.

이곳의 불상조각은 온화하면서 우아한 미를 자랑한다. 이외에 용문석굴의 대표적인 동굴로는

고양동(古陽洞), 빈양동(賓陽洞), 연화동(蓮花洞),약방동(葯方洞), 간경사(看經寺),만불동(萬佛洞),

잠계사(潛溪寺), 대만오불동(大萬伍佛洞) 등이다.

 

 

 

 

 

 

 

흐르는 강물의 이름은 이하(伊河) 입니다

이하의 양안 동쪽은 용문산, 서쪽은 백양사와 백거이 묘도 있는 향산(香山) 입니다.

 

 

 

 

용문석굴(龍門石窟 룽먼스꾸)

낙양 시내에서 동쪽으로 13km 떨여져 있으며 이하 양안 1km의 용문석굴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중국 3대석굴의 하나입니다.

북위 말기 효문제(孝文帝)가 낙양으로 천도하고 시작하여 당,북송에 이르기 까지 400여 년(493년~907년)

의 긴 시간에 남북 1km에 걸쳐 조성되었습니다.

 

역대의 제왕들이 이곳에 와서 분향하면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다하여 용문(龍門)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용문산과 맞은편의 향산에 조성된 석굴은 현존하는 것이 1300여 개인데 굴감(窟龕)은 2345 개이고 불상은 9만 7천 개(자료에 따라서는 10만 개)가 넘습니다.

 

 

 

 

 

 

 

 

 

 

 

 

 

 

황사때문에 조망이 어두운 향산사,

 

 

 

 

 

 

 

 

 

 

 

 

 

 

 

 

 

 

 

 

 

봉선사(奉先寺)와 연화동(蓮花洞 제712굴) :

 천장에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 연화동 앞에 봉선사가 있습니다.

이 봉선사는 서산의 남쪽에 위치하며, 용문석굴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노천대감(露天大龕)입니다.

불감의 동서 깊이는 41m , 남북 폭이 36m인데 주불인 아미타불의 높이 또한 17.14m로서

용문석굴에서 가장 큽니다. 이 불상을 만들 때 측천무후는 지분전 2만관(脂粉錢二萬貫)을 바쳤다고 하며,

또한 개광(開光) 의식 때 직접 참석하였고, 석고(石鼓)를 두드리면서

주악을 울리면서 예불을 올렸다고도 전해집니다. 이 석고는 이하(伊河)의 동쪽 언덕에 있는 큰 바위의 북을 말 합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불상의 얼굴이 측천무후를 닮았다고 말들을 합니다.

 

 

 

 

 

 

 

 

 

 

 

 

 

 

 

 

 

 

 

 

 

 

 

 

 

 

 

 

 

 

 

 

 

 

 

동뽁산인 향산에는 향산사가 있습니다

백거이는 스스로 향산거사(향산거사)라고 했슨데, 이 향산사의 이름도 백거이가 지었다고 합니다.

 백거이가 이곳을 좋아했던 데는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이 무척 아름다워 

즐기면서 많은 시상을 떠 올리지 않았을까 ?

 

 

 

 

 

 

 

 

 

 

 

 

 

 

 

 

 

 

 

 

 

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은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백거이의 지우였던 원진은 백거이의 문집 《백씨장경집》 서문에서, "계림의 상인이 (백거이의 글을) 저자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돈을 내고 시 한 편을 바꾸었다"고 하여, 당시 백거이의 글이 신라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810년당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황제를 대신해 지었으며, 821년에서 822년 사이에 신라에서 온 하정사 김충량(金忠良)이 귀국할 때 목종(穆宗)이 내린 제서도 그가 지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湖)에 건설한 백제(바이띠, 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가 만든 소제(쑤띠, 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며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항저우에서 재직하는 동안 항상 나무 위에 올라 참선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란 별명을 가진 '도림 선사'와의 일화가 재미있으며 다양한 버전이 있다. 약술하자면 백거이가 도림선사에게 불법을 묻자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은 다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백거이가 '세 살 어린 애도 아는 이야기'라며 일축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아이도 알지만, 여든인 노인도 평생을 통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전(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이 있었으니

7 7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이 한은 끝없이 계속되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60년지기 덕곡 친구들

함께해서 감사합니다.